어릴 적, 인적이 드문 대로의 인도를 따라가다 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계단 끝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비라도 내리면 침수될 것만 같은 그곳은 언제나 누추했고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들이 나뒹굴며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었다.

공터의 한쪽엔 좁은 길목이 있었다. 원체 좁고 협소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 길목의 끝엔 내가 살던 작은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밤이라도 되면 세상과 단절된 듯 동굴 입구는 암흑 그 자체였다. 암흑을 주시하자니, 마치 동굴 구석 곳곳에 온갖 잡귀들이 누군가가 들어오기만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듯했다.

동굴 입구에 들어가기 전 난 항상 초조했다. 어둠을 직시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뒤돌아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반짝이는 세상의 거리로 되돌아갈 것인가. 물론, 초조할 뿐 선택은 항상 어둠이었다. 그곳은 어둠이었지만 그 어둠의 저편엔 또 다른 세상이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나의 의지와 생각으로 뭐든 새로운 것을 이룩해 낼 수 있었다. 내 심장으로부터 고동치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나의 몸부림에, 드넑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멀리 실개천이 은빛 아지랑이처럼 반짝이는 곳. 마치 새처럼 푸른 초원 위를 지유롭게 날아다니면 이름 모를 상쾌한 풀 내음이 코끝을 스쳐 지나가고 신선한 저녁 바람이 귓가에 멤돌며, 초원 너머 에메랄드빛 바다와 황금빛 모래사장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황금빛 모래사장엔 내가 살던 테라스가 있는 이층 집이 있었는데 나는 항상 문을 개방해 두었다. 종종 나는 테라스에 놓인 벤치에 앉아 류트를 연주하며 따사로운 봄날의 정취를 느꼈다. 내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류트의 멜로디는... 매우 흥겹고 신났으며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뜨거운 태양과 마주한 어느 날, 난 후끈 달아오른 나머지 버닝 피엔드의 깃털이 달린 녹색 모자를 쓴 채 라마를 타고 길을 떠났다. 언제나 그랬듯, 미지의 세계를 향할 때마다 난 흥분되어 설레발을 쳤지.

그 후, 낯선 지역의 길을 떠나던 중 한 소년을 만났다. 당시 나는 다소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반면, 그 소년은 나보다 더 어렸지만 털털하고 매우 밝은 쾌활한 소년이었으며 -유머가 뭔지 아는 녀석이었어!- 공교롭게도 우리은 매우 잘 어울렸다. 성격은 달랐지만 우리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알았다. 하프와 류트가 우리가 지나온 길목에 멜로디로 자취를 남겼지. 정반대의 성격의 두 사람은 춤을 출 줄 알았고 멜로디의 선율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었다.

지역 이곳저곳 순방하며 우리는 긴 시간을 함께 했다. 궂은 날씨의 힘든 순간도 함께 극복했으며 북쪽 산맥의 아름다운 정경에 매료된 채, 미친 듯이 수다를 떨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잿빛 구름이 낀 어느 날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한 벌판을 둘이 말없이 지나기도 했는데, 그 모든 순간은 최소한 나에게 파노라마 같은 영상의 미를 남겨준 듯하다.

그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난 후, 여덟 달 가량이 지난 시점에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느 선술집에서 에일 주를 마시곤 취기에 조금 들떠 있었지.

"난 한때 여행을 매우 싫어했어. 그건 불편하기만 했다고. 여행을 떠나면 편하게 쉬질 못하잖아? 그리고 오랜 친구를 만날 수도 없지. 난 고향을 떠나기 전에, 내가 살던 집을 떠나는 일은 상상조차 하질 못했지. 그래, 난 머물기를 좋아했고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을 선호했어. 집보다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은 없었지. 아,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편안한 소파에 앉아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한다고 생각해봐! 뉴젤름의 파도소리와 소금기 가득한 바다향, 그리고 선선한 저녁 바람이 머무는 집! 그곳에 있으면 뭐든지 상상할 수 있었고 난 그 상상 속에 삶을 키워 나갔어. 어쩌면 그 상상이 나의 인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래, 그냥 상상 자체의 이야기가 말이야. 그게 바로 나의 삶이고 내가 삶을 마감할 시점에 그 상상을 그리워하는 거지. 난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녀석이었어. 그런 성격 탓에 주위에 친구는 별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친구들은 모두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었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때론 내가 그들을 위로해주기도 할, 매우 절실한 친구들이었다네. 하지만, 거기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이념이 존재했네. 질서와 자유가 존재했어. 사람들은 서로 싸웠네. 질서와 자유에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이 존재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싸우고 피를 흘렸는데, 특히 신뢰와 신념이 강한 이들은 더욱 헌신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길을 향해 나아갔지. 난 질서를 위해 힘을 썼네. 비록 자유주의자였지만 질서 없이는 평화는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나의 그 절실한 친구들 중 몇몇은 나와 반대였지. 마음 아팠지만, 신념과 우정은 타협이 불가능했어. 그리곤 서로의 투쟁 속에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어느덧 존재하지 않았고 내일엔 싸움만이 존재했네. 내일은 더 이상 경이롭지가 않았어. 내가 꿈꾸던 이야기도 타락했지. 전투 속에서 난 나 자신을 잃어버렸네. 감성도 잃었고 암울하기만 했지. 결과적으로, 세속을 벗어나고 싶었네. 정취를 남기지 않고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긴다면, 어쩌면 난 그때야 비로소 노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 어느 날 뜨거운 태양으로 뉴젤름의 모래사장이 반짝이던 때, 나는 무언가를 느꼈지. 우리는 태양이 밝고 뜨겁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을 직접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쩌면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네. 나의 삶 역시 어쩌면 피상적인 이야기로만 수두룩하다는 것을. 그리고 내 여행은 그 태양의 이면을 확인하기 위해 시작되었지."

나의 이야기는 진솔했고 그 친구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때 그는 결코 소년이 아니었다. 그 친구는 평소보다 진지하고 사려 깊어 보였지. 사실 그때 그 친구도 나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난 술에 취한 나머지 그 부분의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후 우리는 한동안 말동무가 되어 같이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의 꿈은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도 더 된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을 지나 어느 고원지대에 도달했을 때 그는 말했다.

"이곳이야. 내가 찾던 곳은. 난 여기서 평생을 살겠어. 양과 토끼를 키우고 그들의 털로 실과 천을 만들 거야."

이별은 슬펐지만, 난 과감하게 그를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간 이곳에 돌아오면 너의 천으로 만든 멋진 옷을 선물해 줘."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겨 연주하던 화음과 춤을 즐겼다.

결국, 난 길고 긴 모험을 다시 홀로 떠났다. 떠나면서 난 생각했다. 어쩌면 먼 훗날, 그 친구는 나처럼 안락한 그곳을 떠나 먼 길을 여행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난 그가 경험해보지 않은 그곳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 많을 거라고 믿었다.

긴 시간이 흘러 앙상한 나무가 메마른 손을 흔들 때, 외딴 오솔길을 홀로 지나던 난 차가운 겨울바람에 몸서리를 쳤다. 그리곤 문뜩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건 내가, 해변에서 자유와 안락함을 느꼈고 라마를 타고 길을 떠났으며 어린 친구를 만났던 시절을 상기시켜주었다. 황금빛 해변에서 연주했던 그 음악.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우리가 함께 연주했던 바로 그 화음. 그 시절을 회상했고 그 녀석이 그리웠다.

소침해진 채, 한동안 멍하니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다가 저밀어오는 가슴을 주최하지 못하고 난 무릎을 꿇고 괴로워했다. 그 영롱한 기억들은 나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붙잩은 채 벗어날 수 없듯이 과거의 순간으로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이유는, 사실 황금빛 해변도, 이 층 테라스도, 라마도, 그 친구도 모두가 거짓이었고 그건 그저 내 작은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은 환상에 불과했으며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은 붙잡을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허망한 허구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오솔길 한가운데 쓰러지듯이 괴로워하며 기침을 해댔다. 매우 외로웠다. 나는 그 소년이 머무는 고원지대의 목장으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갑고 싸늘한 매서운 겨울 공기는 매정하기만 했고 내 주위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는 뉴젤름이나 소년이 살고 있을 고원지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난 망연자실하듯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래도 나의 기억 중에 유일한 진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류트의 선율이었다. 그나마 내가 그 추억을 상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정신을 차린 난 그 선율을 악보에 재빨리 옮겨 적었다. 잊힌다는 사실에, 내 기억에서 다시 사라질까 봐. 그리고 그 선율의 제목을 “Coin Song"이라고 이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