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비를 피해 어느 골목길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는데 퍼레인의 플루트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좋아 그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내 앞에 하얀 쪽지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쪽지의 내용은 기억할 수가 없지만 그 쪽지를 읽었던 나는 곧장 홀로 먼 길을 떠나야만 했다.

도망치듯이 성급히.

이후, 길고 긴 여정 속에서 나는 삶의 현실을 조금씩 배워갔다. 미로 같은 수많은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었던 나는 무엇 하나 뚜렷하지 않았으며 뒤처진 나의 그림자와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짙은 안갯속의 방황을 쉬지 않고 이어 왔다. 나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렸으며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굶주린 채로 벤치에 누워 잠을 잤다. 주위 시선을 피해 감정이 존재하지 않은 어둠 속을 찾아 기어들어가 눕기도 하였다. 세상은 어두운 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그림자는 한결같이 나를 따라왔다. 나는 급기야 질식할 듯 고통스러운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떠나가라 그림자여! 이미 나는 어둠 속에 있으니! 제발 나를 따라오지 마!"

진실이 아닌 현실을 맞이할 수 없었고 그림자가 나를 따라오는 날들이 지속될수록 나는 더욱더 멀리 떠나갔다. 그리고 바람은 나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 바람 끝에 매달려 나의 그림자로부터 도망이라도 갈 수 있었으면...

어느 날, 안개가 자욱 낀 세상을 그림자와 단둘이 나아갔다. 어쩌면 나의 그림자는 단단히 묶여진 하나의 끈처럼 내 인생의 구속물일지도 몰랐고 동반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언제나 함께 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나와 그림자는 끝나지 않는 이 여정에 서서히 지쳐갔다. 그리고 여전히 안개 낀 세상이여! 그건 너무나도 막막한 일이다. 그건 마치 지옥 술탄의 채찍에 내 머릿속이 마구 헤집어지기라도 하듯,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혼돈이다. 안개 낀 날들이 지나면 다시금 미소 띤 볕이 나를 반겨줄 거라는 기대도 해보지만, 지금 난 여기! 안개 낀 지금이! 너무나도 답답하다! 아! 소리를 질러본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 소리를 들어주는 유일한 동지가 내 그림자라고 인지했을 때 난 그림자를 돌아본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이 어두운 그림자는, 아무 말도 없는 이 조용한 그림자는 지금 날 너무 화나게 한다! 나는 소리친다!

“꺼져버려!”

그리고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안개가 걷히자, 나는 석양이 물든 삭막한 붉은 대지 위를 질주하고 있다. 바람보다 빠르고 하늘 위의 매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그림자는 나한테 뒤처질수록 길게 늘어지고 나의 미움은 그 그림자에 대한 어리석은 증오심에 분개할수록 더욱더 빨리 달리도록 나를 채찍질한다. 붉은 토양의 대지와 듬성듬성 보이는 축 늘어진 야생초들은 갈라진 대지 사이에 말라비틀어져 있다. 대지의 왼편 멀리, 하얀 존재가 두 팔을 벌리며 울부짖자, 갑자기 죽은 야생초들이 몸을 일으킨다. 본능적으로 멈추면 안 됨을 인지한 나는 몸을 일으키는 야생초들을 피해 더 멀리 대지의 끝을 향해 질주한다. 귓속은 멍하고 진공 소리만 윙윙거리며 아우성 댄다. 대지의 끝, 끝이 보인다. 나는 끝을 볼 수 있다. 조금만 더 달리면!

어느덧 대지의 끝에 도달했고 나의 질주는 멈출 수가 없어! 그래, 나는 마침내! 대지의 끝 너머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나는 마치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어쩌면 버림받은 그림자의 복수일지도.

어떻게 되었을까? 보이는 건 어둠뿐.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마치 무중력의 우주 공간의 공허함만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림자의 저주를 받은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게 틀림없다.

아! 그러나, 지금 난 너무 편안하다. 마음이 편안하다. 어쩌면 이 칠흑 같은 암흑도 다... 아니? 그래! 나는 눈을 감고 있었어! 눈을 뜰 수가 있다! 조금은 버거운 일이지만.

그리고 서서히 눈을 떠본다. 희미한 주홍빛이 보이는 게 틀림없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희미한 주홍빛에 비친 무언가가 보인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내 앞엔 희미하지만 작은방 안이 보였다. 주홍빛 조명에 잠들어 있는 고요한 작은방. 방안의 모든 것들은 낡지만 가지런히 잠들어 있다. 나는 마치 그 방의 천장이라도 된 듯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작은 방바닥엔 정겨운 꽃사슴 무늬의 양탄자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 양탄자 위엔 다섯 살 가량의 아이와 한 중년의 남자가 다정하게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매우 사랑스러운 아이. 세상의 미움을 모르는 아이. 천진난만한 표정의 그 아이는 왼손에 하늘색 크레용을 들고 작은 스케치 북에 무언가를 쓰고 있다. 사랑스럽다. 그 아이의 글씨는 크고 삐뚤빠뚤할지라도.


아빠


남자의 미소는 아이의 미소처럼 사랑스럽다. 남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잘하는구나, 아가야. 아빠랑 내일 장난감 사러 가자.”

아! 그 순간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동요를 느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간절함은 용오름처럼 솟구쳐 오른다. 하지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 정말 난 그저 천장이라도 돼버린 듯 꼼작할 수 없다. 소리 내어 부를 수도 없다. 미칠 듯이 답답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난 슬픔에 젖어든다. 눈물이 내 시야를 가리자 모든 게 흐릿해지면서 멀어진다. 나는 그것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주홍빛은 그 아이와 남자를 데리고 점점 더 멀어진다. 한 점의 빛이 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더 멀리... 더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