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밤의 추위는 매서웠다. 그날따라 바닷가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새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부산히 몰려오는 작은 파도의 무리는 공허함을 깨는 메아리처럼 아우성쳤다. 싸늘하고 적막하기까지 한 이곳 해변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 하지만 갈 곳을 잃은 한 중년의 남자가 마침내 이곳 해변의 모래사장에 도달했다. 모래사장 너머 새롭게 단장한 커다란 여관은 야광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 야광을 등지고 공허한 모래밭 위에 서서 일렁이는 암흑 바다를 마주하였다. 파도는 마치 깊은 심연 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났고 그에게 점진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동안 춤추는 파도의 유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파도의 파장은 춤추듯 출렁이며 그를 향해 몰려왔지만, 그의 발끝에 도달하기 전에는 모두 소진되고 없어져 버렸다. 그는 그것마저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여기에 오기 직전 마셨던 벌꿀주의 술기운에 그의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바닷바람은 뜨거운 그의 몸을 식혀주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검은 바다 위에 눈에 띄게 대조적인 파도의 하얀 거품을 바라보며 싸늘한 바닷바람을 만끽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온 힘을 다해 그를 향해 달려온 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바다 위의 무수히 많은 파도 조각들. 뜨거운 불은 재라도 남기지만, 저 파도는 무엇을 위해 열정적으로 한순간을 살고 사라져 버리는 걸까. 만일 그들에게도 삶이 존재한다면 일 분도 채 안 되는,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조각 같은 인생일지라. 만약 파도 같은 생이 그에게 주어진다면 과연 그는 그 순간 무얼 하고 떠날 것인가? 조금은 바보 같은 가정인 줄 알면서도 그는 눈앞에 보이는 파도와 같은 생을 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에겐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인연? 소유? 명예? 깨달음? 그토록 짧은 생에선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할 터. 세상에 의미 없는 흔적을 남길 바엔 그냥 저 파도처럼 아무런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성자가 되기에는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저 파도처럼 너무 짧다고 느꼈다. 인간은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지라. 얻는다 할지언정 미완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성자들이 그러한 미완의 깨달음을 마치 진리인 양 세상에 전파하고 다닌다는 사실에 그는 치가 떨렸다. 그는 결국 인간이 한평생 살지언정 깨달음을 얻진 못한다고 생각했다. 도리어 저 파도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아무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어쩌면 성자로서 최선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간혹, 세속을 피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어느 성자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들처럼 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과거에 저지른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파도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서서히 바닷물에 잠겼다. 뼛속까지 잠식해오는 냉온의 아찔함을 견디며 그는 그대로 직진했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을 눈앞의 검은 바닷속에 모두 내던져야만 했다. 그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파도에 저항하며 조금씩 전진하였고 어느덧 그의 몸은 검은 바다의 심연 속으로 완전히 잠기고 말았다.


에드문드는 한때 미덕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가 성인이 되던 날,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숭고한 이들 앞에서 정의로운 삶을 살기로 맹세했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을 때 그의 영혼은 그들로부터 영성을 부여받았다. 신성한 영혼은 그의 정신을 맑게 했다. 그가 이전에 바라보았던 세상은 모두 사라졌으며 모든 만물이 새로운 가치와 희망으로 반짝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빛을 더욱 밝게 비추리라 결의에 가득 찬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길을 떠났다. 


영성을 부여받은 그는 성자의 길을 가야만 했다. 영성을 위한 기본 자질은 동정, 희생, 정직, 그리고 숭고였다. 그는 선대 위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따르기 위한 미덕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길을 떠나면서 어렵고 힘든 이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그는 수행을 지속하며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를 전파하였다. 선행도 지속하였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하였다. 그는 십 년을 쉬지 않고 떠돌면서 세상에 자신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찾아갔다.


그러던 그는 수도 중에 우연히 한 작은 시골 마을에 다다랐다. 그 마을은 서쪽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는데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마을은 겨우 스무 가구가 살 만큼 매우 작았다. 이곳에 막 도달했을 때 에드문드는 떠들썩한 거리의 광경을 목격하였다. 주홍 머리칼의 한 젊은 여인이 거리에서 주민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몰매질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몰매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증오하고 경멸하였다. 이유인즉슨, 그녀가 외도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마을에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인성이 그릇됐다고 하면서 그녀가 돈을 벌러 간 남편에게 배신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하며 그녀를 마을에서 쫓아내려고 하였다. 여인은 옷이 여기저기 찢기고 온몸이 피멍이 든 채 거리에 쓰러져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남자는 그 여인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제치고 나선 그는 자신이 에드문드 수도승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에드문드라는 이름에 모두 놀라 했다. 그 외딴 마을마저 이미 이 존경스러운 선지자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업고 그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인근에 버려진 작은 오두막에 그녀를 데려온 남자는 그녀를 잘 보살펴 주었다. 그녀에게 물과 음식을 주었고 흙과 함께 피부에 말라 굳어버린 피를 닦아주었다. 찢어진 그녀의 피부에 약을 바른 후, 약초와 헝겊을 덧대 상처가 아물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고 종일 아무 말도 없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고 그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자정을 지날 무렵,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그녀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선잠에 빠져있었던 에드문드는 바로 잠에서 깨어나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북쪽의 금광으로 떠난 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어요. 안데라스라는 청년이었죠.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그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남자였어요. 특히 눈이 예뻤고 미소는 달콤했죠. 어느 화창한 봄날의 토요일 오후, 마을의 호수에서 그와 처음 마주쳤어요. 그는 호숫가에 앉아서 따스한 봄날의 정취를 홀로 만끽하고 있었죠. 저는 한눈에 그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저희 마을은 매우 작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거든요. 그는 떠돌이였는데 우연히 이곳을 찾아왔다고 했어요. 마치 선생님처럼요. 저를 마주한 그는 저에게 마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죠. 때마침 홀로 산책에 나섰던 저는 말동무가 생겨서 좋았어요. 그와 함께 호숫가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죠. 우리 마을에 대해서 특별히 해줄 이야기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는 저에게 다양한 경험을 공유해 주었어요. 그가 다년간 여행을 다니면서 겪었던 이야기는 저에겐 매우 놀랍고 황홀하기만 했죠. 제가 가보지 못했던 지역의 문화와 음식 그리고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책에서 읽었던 것과는 아주 달랐어요. 그의 이야기는 훨씬 더 생동감이 넘쳤고 마치 제가 그곳에 간 것과 같은 경험을 선사해 주었죠. 그의 말솜씨는 재능있었어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가는 줄 몰랐죠."


아늑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었다. 그녀의 초췌한 얼굴마저 수줍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홀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결국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게 됐어요. 그는 저와 더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죠. 아뇨, 사실 제가 먼저 그를 집으로 초대했어요. 사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 몸은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는 이미 알게 되었죠. 제가 이미 그의 매력에 빠져버렸다는 것을. 모르겠어요. 그냥 그는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그의 외모는 물론, 그에게서 풍기는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선생님께서는 제가 더러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으시겠죠. 하지만, 본능을 제어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사실 그와 더 같이 있고 싶었고 어두운 밤 그를 저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제 남편을 기만한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남편은 저 먼 곳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금광을 캐고 있었겠죠. 하지만, 제가 남편을 떠나겠다고 다짐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단 하루, 마치 족쇄에 꽁꽁 묶여버린 듯한 저의 말라버린 영혼에 자유를 주고 싶었어요. 가여운 제 본능에 자유를 허락하고 싶었어요. 제 인생에서 잊어버린 뜨거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어요. 차라리 그날 죽어버릴지라도 후회 안 할 만큼 저는 그 갈망에 허덕이었죠. 결국, 그날 밤 그에게 제 몸을 허락하였고 우리는 잊지 못할 한순간을 같이 보냈어요."


남자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그녀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다음날 안데라스는 마을을 떠났어요. 멀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말이죠. 정말 그는 바람 같은 인생을 사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같지 않나요? 정착만 해 온 저에게는 조금은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저희는 다시는 만날 일은 없겠죠. 그럴지언정, 저는 그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해요. 남편에게는 비밀이지만 저는 제 인생을 살다가 간혹 그날을 회상할지 모르죠. 그와 단 하루, 뜨거운 사랑을 속삭였던 그 순간 말이죠. 일 년 전, 집을 떠난 제 남편을 하루하루 기다리면서 지쳐 말라버린 저의 정신과 육체에 그는 맑은 샘물과도 같았어요. 제 얼굴을 마주하던 그의 부드러운 미소, 어린아이처럼 달콤한 입술. 그리고 따스한 체온.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의 뜨거운 심장 고동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져 저의 가슴에 도달하는 순간, 저는 그 요동에 심장이 터질 듯 미쳐버리는 줄 알았죠. 남편을 처음 만난 이래로 잊고 있었던 사랑의 달콤함을 느꼈어요. 정말 오랜만이었죠."


"정말 아이러니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육체적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구속해야만 하죠. 그리고 그날 하루, 우리는 우리 둘의 육체와 영혼이 불꽃처럼 타올랐고 마치 전소하듯 사라져 버렸죠. 그리곤 타고 날아가 버린 연기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그렇게 우리 둘의 관계는 끝이 났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가 말했다.


"여인, 사랑은 고귀하고 육체적 욕망은 신이 주신 자연의 섭리지. 그것을 부정할 순 없다오. 여인의 그 욕망을 그 누구도 비난할 순 없지. 세상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오. 그들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때로는 내면엔 그러한 욕망을 주최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오. 나라고 다를 바 없지 않소. 하지만, 잘 들어보시오. 이 일이 당신과 그 안데라스라는 청년 둘 사이의 관계로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여인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가 받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신은 인간에게 육체적 욕망을 부여하기 전에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정신과 감정의 능력을 주었소. 여인처럼 모두가 그걸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이 세상은 결코 용납될 수 있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오. 보시오, 이 일로 인해 결국 여인은 마을에서 쫓겨났고 큰 상처를 받지 않았소?"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그럴지언정, 저는 인생에서 단 하루, 잊지 못할만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제게 그렇게 후회할만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어두운 방에서 제 옆에 있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보내는 그 시련은 그 어떤 고통과도 바꿀 수 없었어요. 제 꽃은 시들었고 남편을 미워하기 시작하였죠. 제 마음의 상처는 커져만 갔어요. 오히려 지조를 지키는 동안 제 영혼과 육체는 병들어 가는 듯했어요. 지독한 고독의 시련은 제 영혼의 공간에서 독처럼 검게 퍼져나갔죠. 그 날, 안데라스를 호숫가에서 외면했다면, 저는 분명 그토록 달콤한 경험을 제 인생에서 해보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잊지 못할 보석 같은 경험을 하였고 그 날 이후 저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한 듯했어요. 그날을 후회하지 않아요. 제 인생의 한 공간에는 분명 안드레스가 존재할 테니깐."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뱉은 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 남편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겠죠.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모를지도 몰라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 때문에 남편이 힘들고 괴로워하는 것을 저 역시 원치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세상이 제가 희망한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겠죠? 물론 그러기 전에 저는 남편에게 편지를 보낸 후, 이 마을에서 멀리 벗어나 남편과 새롭게 시작할 거예요. 마을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말이죠. 남편이 이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어요."


여인이 남편을 속이고 싶어 한다는 말은 에드문드에게 가시거리처럼 들렸다. 에드문드에겐 거짓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성자의 길을 걷는 동안, 무수히 많은 일을 겪었다. 거짓과 속임수는 결국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진리는 틀리지 않았었다. 진실은 선하다는 사실을 그는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에드문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 저는 제가 무얼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어요. 지조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어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피하지 못했던 저 자신을 원망하면서도 저는 한편으로는 기뻐요. 기쁘다고 표현한다면, 분명 선생님은 저를 이해하지 못하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인, 죄를 지은 자가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불의에 대한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파괴되고 말 것이오. 마을 사람들이 여인을 손가락질하고 마을에서 쫓아낸 것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하오. 여인이 기쁘다는 사실도 진실이라고 믿소. 하지만 여인의 그 거짓된 욕망이 결국엔 여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것이오. 남을 배신하고 거짓으로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자세는 옳지 않소. 진실은 선하다는 진리를 잊지 마시오. 진실을 구하되 용서로서 상처를 치유해야만 하오. 여인은 고해하고 죄를 뉘우친 후, 남편과 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오. 그것이 사람으로서 할 도리라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바닥에 떨구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생님마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겠어요. 남편이 돌아오는 날, 그에게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겠어요."


다음날 이른 새벽, 여인은 성당을 찾아가 고해를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마을로 향하였고 에드문드는 오랜 여정으로 인한 피로로 그녀가 오두막에서 떠났는지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에드문드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방 한구석에 잠을 청했던 여인은 없었다. 그는 그녀가 이미 마을로 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간단한 채비를 마친 그 역시 마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성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에드문드는 또 다른 부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이번에는 뭔가 더 큰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에드문드는 직감했다. 그는 성당 앞에 버려진 듯 놓여있는 피투성이가 된 싸늘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어젯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아..."


그녀를 못마땅하던 주민들이 결국 홧김의 동조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에드문드는 전신에 힘이 빠지듯 휘청거렸다. 마치 이 일의 경위가 자신의 책임인 양, 보이지 않는 육중한 무게가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거기엔 특정한 살인자도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이 일의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죄를 지었으며, 그에 대해 대가를 받은 것이다. 그녀는 경솔했으며 그녀의 이기적인 마음이 이 일을 좌초한 것이었다. 이 결말은 그녀의 잘못에 대한 처벌이었다. 안쓰러웠지만, 이제 돌이킬 수도 없었다.


에드문드는 그녀의 시신을 그녀가 안드레스를 만났다던 그 호수가 인근에 묻어주었다. 에드문드는 그 마을을 황급히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성자로서 해야 할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였고 그의 영성을 사람들에게 실천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마을 인근의 버려진 그 오두막을 손질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전파하는데 몰두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가 그 마을에 머문 지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죽은 여인의 묘지에는 어느덧 풀이 무성했고 호숫가의 버드나무 이파리가 산들거리는 어느 봄날인 무렵, 어느 한 건장한 남자가 마을에 다다랐다. 그는 죽은 여인의 남편이었다. 그 남자는 그의 아내가 죽었는지도 모른 채, 한때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자신 아내의 모습만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한가득 보따리를 매고 즐거운 귀향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그가 마을에 도착했을 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의 아내가 자신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한동안 버려져 있었던 자신의 집을 찾아갔으며 곧 그녀가 이 마을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아내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해가 되었고 그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한 편, 농사일하고 있었던 에드문드는 죽은 그녀의 남편 복귀 소식을 듣고 곧장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에드문드가 집에 도달했을 땐, 남자는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에드문드는 그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마치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죽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에드문드에게 바로 되물었다. 에드문드는 그를 그의 아내의 무덤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었던 일을 그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그녀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가 질 무렵, 호숫가에는 핏빛 석양이 물들어 있었다. 에드문드와 남자는 여전히 여인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남자는 혼잣말을 하듯 성자에게 말을 했다. 


"얼마나 그녀가 외로웠을까. 그녀가 그날 어느 젊은 청년과 눈이 맞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를 따라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단 말이오. 그녀는 계속 나를 기다렸을 것이오. 그녀가 그날 외도를 했건 말건, 난 그러한 그녀의 모습조차 사랑할 수 있는 그녀의 남편이오. 그녀를 탓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소. 애초에 그녀를 두고 간 건 나였소. 되레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내가 죄인이오."


두 눈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건장한 남자의 두 눈동자에는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에드문드는 깊은 후회와 절망에 빠진 그를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자정을 넘은 시각, 마을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여인들의 빨래터이자 작은 야외 회의장이 있는 마을의 중심지의 우물가엔 한 남자의 무거운 노랫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그녀가 있는 곳까진 그리 멀지가 않네


눈을 감은 당신은 먼저 나를 떠나갔고


어두운 그림자 후회로 흐느끼네


당신은 멀리서 나를 기다리네


나는 신께 맹세하오


지금 나 어둠과 함께 걸어갈 테니


그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촛불이 불타듯 내 마음도 간절하니


이제 그곳에서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내 몸은 가벼우니 


한숨을 쉰 후, 지금 당장 발걸음을 옮긴다



곧이어 그 작은 마을에는 뜨거운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남자는 마을을 뛰어다니며 미리 준비한 기름과 불통을 불이 탈 만한 곳 여기저기에 마구 던졌다. 헛간의 볏짚에 던졌으며 지붕 위로 던졌다. 집이 겨우 스무 채 되는 이 작은 마을을 지워버리는 일은, 미쳐 실성한 한 남자에게 있어서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이어 마을의 모든 집은 불길에 휩싸였으며 주민들의 비명, 통곡 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 편, 마을의 밖 오두막집에서 잠에서 뒤척이던 에드문드는 멀리 마을 위 붉게 번뜩이는 저녁 밤하늘에 결국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오두막에서 나와 마을을 향해 바라보았다. 삼키듯 타오르던 마을의 화염은 마치 악마 같은 연기로 서서히 뒤덮이고 있었다. 그는 불타는 그 마을의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충격에 휩싸였으며 그의 심장은 두려움에 요동을 쳤다. 그는 눈앞의 그 공포를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었다. 불타는 마을에는 죽은 여인의 환영과 절망에 빠진 남편의 환영이 같이 일렁거렸다. 남자는 화염의 도시를 등지고 어두운 산자락 속으로 엉거주춤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화염의 불길로부터 도망치는 동안, 그는 그동안 그가 걸어온 성자의 인생이야말로 경솔했고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실이 선하다는 그의 신념은 산산이 조각나며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 진실은 결국 파멸을 몰고 왔다. 그곳엔 모두를 위한 세상은 결코 없었다. 그의 눈앞엔 어떠한 선도 없었으며 그곳은 증오와 희생만이 존재했다. 그의 신념은 한 작은 마을에 파멸만 몰고 왔을 뿐이었다. 그를 믿던 사람들은 그렇게 화염의 불길 속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에드문드는 혼돈의 나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듯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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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둠의 참상" 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는가?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 존재는 마치 공포를 직시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소문 속의 존재이다. 설사 소문일지라도 입에서 입으로 퍼져온 그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어젯밤 꿈처럼 기억에 생생하면서도 충격적인 삽화를 보듯 뇌리에 박혀 한때 사람들은 그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서쪽 폭풍의 강 건너 구릉지대로 배경을 옮겨야만 한다. 그곳에서 간혹 그를 봤다는 소문이 여러 존재했다. 그에 대한 목격담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와전됐을지 모르지만 하나같이 똑같은 증언도 분명 존재했다. 초승달이 뜨는 밤, 언덕 위에 살며시 드러나는 그의 정체. 마치 어둠을 두르듯 경계가 불분명한 커다란 암흑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망토 안으로 비치는 그의 몸체는 마치 블랙홀처럼 빨려들 것만 같은 심연 같다고 했다. 그리고 월광을 삼키듯 번뜩이는 두 눈동자를 바라보자면, 마치 보는 이의 영혼이 전소하는 듯한 전율에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보기 전엔 반드시 종소리가 구릉지대에 울려 퍼졌다. 그것이 실제로 종소리인지 확인된 바는 없으나, 그 근원지는 분명 어둠의 참상이 분명하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그를 목격한 사람들에겐 어둠의 참상은 "죽음" 그 자체였다. 그건 저주였고 회피의 대상이었다. 그 누구도 어둠의 참상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 경험을 증오하고 저주했다. 이 때문에, 이야기 속의 어둠의 참상은 주위 모두가 공감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가십거리로서, 욕지거리에 적합한 이름이었으며 어떤 무리의 사람들은 그 존재를 찾아 파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가장 신뢰할만한 이야기가 하나 존재한다. 그 이야기는 국립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서적 "버나드의 여행기" 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지는 버나드 자신의 여행기를 담고 있는데 그가 여행 도중에 알게 된 어둠의 참상에 대한 기록도 존재한다. 다음은 그의 기록지에서 발췌한 이야기의 핵심이다.


「어둠의 참상에 대한 진실 여부를 논하는 것은 더는 의미가 없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참상은 바로 나의 오랜 친구 "트루크"임에 틀림없다. 분명하다. 내 친구 트루크는 이전에 그가 구릉지대를 지나면서 소문의 어둠의 참상과 매우 유사한 존재를 마주한 사실을 나에게 이야기해 준 적이 분명 있었고,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 어둠의 참상에 대한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트루크가 사라진 이후 어느 날, 난 여러 방면에서 어둠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둠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 난 트루크가 나에게 해주었던 어둠의 참상에 대한 그의 기억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과거에 트루크와 란드라서 그리고 나는 세피로를 만나기 위해 어느 가을날 서쪽의 키콜라스 산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 여정의 중간에 폭풍의 강을 건넜는데,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서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는 불행히도 란드란서와 함께 "다크무어"로 휩쓸려서 그 어둠의 대지를 란드란서와 함께 고전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오히려 행운이었다-, 트루크는 다크무어 보다 조금 더 남쪽인 구릉지대로 휩쓸려 가고 말았다. 갈라진 파티에서 트루크는 조금은 외로움을 느꼈겠지만, 그는 숭고한 정신과 강인한 의지로 가득한 친구였다. 그는 다시금 서로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로 홀로 꿋꿋이 나아갔다. 


초승달이 뜬 저녁이었다. 가을밤의 바람은 싸늘했고 그는 다소 지친 육신을 다스리며 홀로 구릉지대를 지나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 야영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을 무려, 그의 앞의 언덕 위엔 낯선 그림자가 달빛을 삼키고 있는 것을 그는 느꼈다. 순간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종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소름이 돋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곤 언덕 위를 주시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그보다 더 진하고 탁한 어둠이 마치 검은 물감 속에 퍼져 나가는 암흑처럼 울렁거리는 것을 그는 시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그건 분명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트루크가 이야기하길, 그 어둠의 존재로부터 그는 마치 죽음을 대동하는 "지옥의 개"의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어둠 속의 늑대의 눈빛?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고 했다. 그건 말 그대로 그날 밤에 존재하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심연이었으며 그 두 눈을 마주하자니 자신의 영혼까지 빨려들 정도였다고 했다. 전쟁 속 강인한 정신을 소유하지 않는 자라면 거기서 이미 운명은 다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트루크는 결코 뒷걸음치지 않았다. 그는 비록 그 존재를 처음 보았지만, 그 어둠의 존재로부터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아니, 직감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는 어둠의 존재가 구릉지대를 지나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로부터 뿜어져 오는 기운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으며 그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는 두 검을 뽑아들었다. 다행히도 그의 두 손은 강인함 힘으로 가득 찼다. 그의 용맹은 그 어둠의 존재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그 어둠의 존재가 가로막는 언덕 위로 뛰어들었다. 언덕 위는 순식간에 일렁이는 월광과 암흑이 뒤섞이고 흩어졌다. 트루크는 그 어둠의 존재가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검을 휘둘렀다고 했다. 트루크 역시 어둠의 존재에 맞서 두 검으로 맹렬하게 투쟁했다.  


당시 난 트루크에게 그 어둠의 존재와 꼭 결투해야만 했는지 물었다. 그가 대답하길, 그 선택은 그의 마음속의 정당한 울림의 결의였다고 했다. 그건 모두를 위한 자신의 숭고한 희생이었으며 그 존재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훗날 자신의 자손들에게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겐 아직 용맹의 불꽃이 살아있었으며, 그 때가 비로소 그가 세상을 위한 보이지 않는 헌신을 할 기회이기도 했다고 했다. 그 누구도 원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직감했으며 그 선택이 바로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믿는다고 했다.


전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트루크는 지쳐갔지만, 어둠의 참상의 상태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밤이 지나 새벽녘까지 전투는 계속되었고 트루크는 간신히 그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오로지 경험과 신념으로 싸움을 지탱할 수 있었다. 


난 그의 이야기로부터 그날 밤 그 구릉지대에 새겨진 한 남자의 숭고한 정신에 감탄했다. 아,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외로운 곳에서 공포에 맞서 싸웠던 한 남자는 과연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 전투의 끝은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겨졌을까? 설사 그게 패배일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는 승패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전투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곤 어쩌면 기쁜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싸웠을지도.


전투의 종결은 어처구니없었다. 그들의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을 듯 보였지만 비로소 동틀 녘,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어둠의 존재는 잿빛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그건 결코 도주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사라져버린 자리엔 그가 휘둘렀던 칼자루만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칼자루엔 검날도 보랏빛 연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칼자루였다.


트루크는 그 칼자루를 지쳐버린 눈동자로 한동안 바라봤다고 한다. 그리곤 본능에 따라 그 칼자루를 거머 쥐었다. 어떤 느낌이었을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는 그 칼자루는 비록 검날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뭔지 모를 오래된 매력이 물씬 풍겼다고 했다. 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 칼자루를 쥐곤 보랏빛이 일렁이는 검날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의 검날을 허공에 한두 차례 휘두른 후, 만족해하며 자신의 배낭에 그 검자루를 기념품으로 챙겼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트루크가 마주했던 어둠의 참상에 관한 내용이다. 이후 그는 성공리에 여정을 마쳤고 란드란서와 나는 최종 목적지에서 그를 다시 만나 그 이야기를 직접 건네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였다면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해 봄 어느 날 갑자기 트루크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 편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으며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 검자루가 지닌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네. 이제야 비로소 말이지. 그 검자루엔 마법의 비밀이 틀림없이 존재해. 난 내일 당장 그 비밀을 확인하러 그 구릉지대를 향해 다시 떠날 것이네. 하지만 자네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거기엔 나 혼자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이 존재하거든. 하지만 걱정 말게. 내가 비밀을 밝힌 후 자네에게도 꼭 멋진 이야기를 전달해 줄 테니.


사실 그 통보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난 그 어둠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둠의 참상이라는 이름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도 트루크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고 오히려 엉뚱하면서도 섬뜩한 소문만 들려왔다.


그건 바로 어둠의 참상에 대한 소문이었다. 어느 날 어둠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 퍼졌고 그 소문의 내용을 직접 분석해 보자면, 그 구릉지대로 떠난 트루크의 마지막 모습만이 연상될 뿐이었다. 그리고 어둠의 참상에 대한 이미지는 과거에 트루크가 파멸시킨 어둠의 존재와 무서울 정도로 유사했다. 아니 사실 트루크가 무찌른 그 존재는 어둠의 참상이 확실했다. 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트루크는 그 존재를 이미 파멸시키지 않았던가?


모든 이야기는 점점 더 분명해져 갔다. 구릉지대로 돌아간 트루크는 검자루의 비밀을 밝힌 이후 본인이 어둠의 참상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건 비밀이 아니라 검이 선사한 저주였을 것이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는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트루크는 그 검날을 쥐어든 순간부터 이미 저주에 빠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구릉지대로 떠나기로 했다. 지금 내가 작성하는 이 이야기는 만일을 위해 남겨두는 나의 유언이다. 사람들이 증오하고 멸시하는 그 괴물의 존재가 바로 나의 친구라면 그를 용서해 달라. 한 때 숭고한 정신과 영혼을 지녔던 그의 순순한 의지를 이해해 달라. 사람들은 어둠의 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울화통이지만,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보석 같은 이들이 바로 어둠의 참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 당신이 지금보다 조금 더 용맹하고 정의와 희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바로 그 어둠의 참상의 저주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까지가 버나드의 일지에 존재하는 어둠의 참상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버나드의 일지 역시 끝이 난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울 뿐이다. 사람들은 버나드가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지만, 어쩌면 진정한 선구자는 그의 친구 트루크였으며 비록 그들이 당시의 사람들에겐 어둠의 참상이라는 괴물로서 평가되었지만, 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현대의 인물학에서는 그들은 정의를 수호하려고 자신들을 희생한 당대의 위인들로 재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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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중학생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살던 동네의 환경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동네 거리는 전봇대의 너저분한 전선들과 늘어진 차량들의 불법 주차로 매우 어수선했었는데, 도로 바닥마저 여기저기 금이 가 있거나 시멘트를 덧대어 곳곳이 울퉁불퉁하여 보기 좋지 않았었다. 하물며 길가엔 언제나 쓰레기가 고여있었고 전봇대 밑둥 역시 항상 쓰레기 더미가 존재했다. 그 시절 나의 통학 풍경은 그러했다. 하지만 더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는 통학 길에 있는 작은 하천이었는데,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그 하천을 따라가다가 하천 위의 허름한 다리를 나는 지나야만 했었다. 물론, 그 하천 부근 역시 도시의 매연으로 검게 그을리고 쓰레기가 썩어서 여기저기가 시커맸으며 하천의 물 또한 오염되어 악취로 가득했다. 특히 탁한 하천의 썩은물은 녹조까지 심했으며 수포와 더러운 쓰레기가 수면 위 곳곳에 존재했다. 그 곳 풍경과 악취는 나에게 결코 좋은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심지어, 난 가끔 그 하천의 물을 마시곤 녹색 괴물로 변해버리는 상상을 하곤 했었으니깐. 어쨌든, 나의 통학길의 풍경은 그러했다. 평균 나의 학교 통학 시간은 어림잡아 30분. 평소 나는 학교를 달리다시피 다녔으며 특히나 지루한 등하교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었다.

어느날, 난 늦잠을 자곤 허겁지건 학교를 향해 뛰어갔다. 때는 이른 여름이었다. 그날도 역시 하천을 지나 학교로 가야만 했는데, 하천을 따라 놓인 길을 지날 즈음에 난 속보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 보이는 하천 다리 중간 즈음에, 눈에 띄는 작은 뭔가가 다리 밑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서퍼런 작은 무언가였는데 여름날 아침의 하천 다리 밑은 대낮처럼 훤했다. 게다가 하천 다리 밑 천장은 매연으로 시커멓게 그을린 이끼들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대조적으로 눈에 띄게 잘 보였다. 하천 다리에 도달할 때 쯤, 난 그게 새임을 알 수 있었다. 그건 파랑새였다. 어느날 갑자기 그 새는 하천 다리 밑에 둥지를 짓곤 홀로 살기 시작한 것이다. 새의 파란 빛깔이 신기했지만 그다지 나의 관심거리는 되지 못했다. 난 파랑새를 스쳐지나가듯 쳐다보곤 지나갔다.

이후, 이상하게도 그 하천을 지날 때마다 나는 다리 밑에 그 파랑새가 있는지 꼭 확인을 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럴려니 했지만 그 새는 왠지 모르게 나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 새가 그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파랑새를 처음보기도 했지만 새가 보유한 파란 깃털은 하천 다리 밑의 매연으로 그을린 새까만 그곳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한마디로 어울리지가 않았다. 최소한 그 새가 아름다운 정경의 숲 속에 살아야 한다고 난 생각했다.

비 오는 어느 날, 하교길에 난 그 새를 가까이 가서 관찰해 보기로 결심했다. 오후 다섯 시쯤이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다리 밑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산을 든 채, 난 홀로 다리 밑에 서서 위를 올려다 보았다. 다리의 천정 높이는 내가 서있는 도로로부터 약 4미터 가량의 높이로 그다지 높진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와 다리에 맺힌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뒤엉켜 다리 밑에서 웅성웅성 메아리를 치고 있었다. 난 비에 옷이 홀딱 젖은 채, 지푸라기와 흙으로 만든 새 집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집은 겸손하다시피 작았으며 그 안의 파랑새는 눈을 감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 새는 내 주먹보다도 더 작아 보였다. 몸은 마치 작은 푸른 잎사귀처럼 보였으며 그 사이로 아담한 검은 부리만이 눈에 살짝 비쳤다. 나는 그 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근데 그 새가 가진 파란 빛깔은 왠지 모르게 구슬펐다. 그 새는 잠을 자면서도 덜덜 떨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곤, 난 집으로 발걸음을 곧장 옮겼다.

이후, 나는 그 새가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새가 병들진 않을지 의심되기도 하였다. 그곳은 그 새가 살기엔 적합한 곳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새의 보금자리가 따로 필요한 건 아닌지, 대기 오염으로 인해 질식하는 건 아닌지, 내가 직접 그 새를 그곳으로부터 구원해줘야 하는건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에 도착하면 금새 그 새의 존재를 잊을 수 있었지만, 하천을 지나갈 때면 그 새를 다시 확인하곤 잊고 있었던 그 새가 다시 신경쓰였다.

그 새는 언제나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난 한 번도 그 새가 노래를 하거나 우는 모습을 보진 못했다. 그 새는 그저 고요히 잠을 자거나 둥지에서 여기저기 가만히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새를 볼 때마다 측은한 감정이 들기도 했는데, 텅빈 새까만 다리 밑에 홀로 있는 그 새는 왠지모르게 가엽고 슬퍼보였다.

여름의 막바지 쯤, 그날도 둥지 안의 그 새를 지켜보았다. 그 새는 어느덧 많이 야위여 있었다. 그 새의 파란 빛깔의 깃털 또한 탁한 남갈색으로 바래 있었다. 난 그 새가 매우 안쓰러웠다. 그 새는 마치 최후의 통첩을 기다리는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어쩌면 나한테만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지 언정, 그 파랑새는 누군가가 돌봐줘야 할 야윈 소녀같은 존재처럼 내게 느껴졌다. 난 그 새가 머지 않아 이 곳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 때가 내가 본 파랑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정확히 그 다음날, 그 둥지에는 파랑새는 없었다. 먹이를 찾아 잠시 자리를 비웠을 거라고 생각해 봤지만 통학하는 동안 그 새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저 버려진 둥지만 다리 밑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을 뿐. 이후, 한 동안 난 그 새가 매우 그리웠다. 이미 떠나고 존재하지 않은 그 파랑새가 지녔던 순수한 미와 매력을 난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난 그 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한동안 알 수 없었다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새에 대한 이야기를 뒤늦게 들을 수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누군가는 그 파랑새가 다른 새와 같이 하늘 멀리 날아가는 걸 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 그 새는 소리내어 노래했다고도 했다.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비로소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최소한 그 새는 더러운 도시에서 오염되어 죽진 않았으니깐.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였으며 마음이 아려 오기도 하였다. 만약 파랑새처럼 고귀한 자연의 동물과 사람들이 한 곳에서 같이 살 수 있었더라면 난 그 아름다운 파랑새를 매일같이 바라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상은 그렇지 못했으며 작고 어린 내가 그 새를 해줄 수 있었던 일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그 파랑새와 함께 자연으로 돌아간 그 새가 나였더라면..."

그 새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 가슴앓이로 고생하던 그 때 난, 그렇게 괴로워하며 아파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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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인적이 드문 대로의 인도를 따라가다 보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계단 끝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비라도 내리면 침수될 것만 같은 그곳은 언제나 누추했고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들이 나뒹굴며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었다.

공터의 한쪽엔 좁은 길목이 있었다. 원채 좁고 협소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 길목의 끝엔 내가 살던 작은 동굴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밤이라도 되면 세상과 단절된 듯 동굴 입구는 암흑 그 자체였다. 암흑을 주시하자니, 마치 동굴 구석 곳곳에 온갖 잡귀들이 누군가가 들어오기만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듯 했다.

동굴 입구에 들어가기 전 난 항상 초조했다. 어둠을 직시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뒤돌아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반짝이는 세상의 거리로 되돌아갈 것인가. 물론, 초조할 뿐 선택은 항상 어둠이었다. 그 곳은 어둠이었지만 그 어둠의 저편엔 또 다른 세상이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나의 의지와 생각으로 뭐든 새로운 것을 이룩해 낼 수 있었다. 내 심장으로부터 고동치는 자유에 대한 열망과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나의 몸부림에, 드넑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멀리 실개천이 은빛 아지랑이처럼 반짝이는 곳. 마치 새처럼 푸른 초원 위를 지유롭게 날아다니면 이름모를 상쾌한 풀내음이 콧끝을 스쳐 지나가고 신선한 저녁바람이 귓가에 멤돌며, 초원 너머 에메랄드 빛 바다와 황금빛 모래사장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 황금빛 모래사장엔 내가 살던 테라스가 있는 이층 집이 있었는데 나는 항상 문을 개방해 두었다. 종종 나는 테라스에 놓인 벤치에 앉아 류트를 연주하며 따사로운 봄날의 정취를 느꼈다. 내 손끝에서 울려퍼지는 류트의 멜로디는... 매우 흥겹고 신났으며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뜨거운 태양과 마주한 어느날, 난 후끈 달아오른 나머지 버닝 피엔드의 깃털이 달린 녹색 모자를 쓴 채 라마를 타고 길을 떠났다. 언제나 그랬듯, 미지의 세계를 향할 때마다 난 흥분되어 설레발을 쳤지.

그 후, 낯선 지역의 길을 떠나던 중 한 소년을 만났다. 당시 나는 다소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반면, 그 소년는 나보다 더 어렸지만 털털하고 매우 밝은 쾌활한 소년이었으며 -유머가 뭔지 아는 녀석이었어!- 공교롭게도 우리은 매우 잘 어울렸다. 성격은 달랐지만 우리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알았다. 하프와 류트가 우리가 지나온 길목에 멜로디로 자취를 남겼지. 정반대의 성격의 두 사람은 춤을 출 줄 알았고 멜로디의 선율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었다.

지역 이곳 저곳 순방하며 우리는 긴 시간을 함께 했다. 궂은 날씨의 힘든 순간도 함께 극복했으며 북쪽 산맥의 아름다운 정경에 매료된 채, 미친듯이 수다를 떨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잿빛 구름이 낀 어느 날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한 벌판을 둘이 말없이 지나기도 했는데, 그 모든 순간은 최소한 나에게 파노라마 같은 영상의 미를 남겨준 듯 하다.

그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난 후, 여덟 달 가량이 지난 시점에 우리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느 선술집에서 에일주를 마시곤 취기에 조금 들떠 있었지.

"난 한 때 여행을 매우 싫어했어. 그건 불편하기만 했다구. 여행을 떠나면 편하게 쉬질 못하잖아? 그리고 오랜 친구를 만날 수도 없지. 난 고향을 떠나기 전에, 내가 살던 집을 떠나는 일은 상상조차 하질 못했지. 그래, 난 머물기를 좋아했고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을 선호했어. 집보다 더할 나위없는 공간은 없었지. 아, 하루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편안한 소파에 앉아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한다고 생각해봐! 뉴젤름의 파도소리와 소금기 가득한 바다향, 그리고 선선한 저녁 바람이 머무는 집! 그 곳에 있으면 뭐든지 상상할 수 있었고 난 그 상상 속에 삶을 키워 나갔어. 어쩌면 그 상상이 나의 인생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래, 그냥 상상 자체의 이야기가 말이야. 그게 바로 나의 삶이고 내가 삶을 마감할 시점에 그 상상을 그리워하는 거지. 난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녀석이었어. 그런 성격 탓에 주위에 친구는 별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친구들은 모두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었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때론 내가 그들을 위로해주기도 할, 매우 절실한 친구들이었다네. 하지만, 거기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이념이 존재했네. 질서와 자유가 존재했어. 사람들은 서로 싸웠네. 질서와 자유에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이 존재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싸우고 피를 흘렸는데, 특히 신뢰와 신념이 강한 이들은 더욱 헌신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길을 향해 나아갔지. 난 질서를 위해 힘을 썼네. 비록 자유주의자였지만 질서없이는 평화는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나의 그 절실한 친구들 중 몇몇은 나와 반대였지. 마음 아팠지만, 신념과 우정은 타협이 불가능했어. 그리곤 서로의 투쟁 속에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지.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어느덧 존재하지 않았고 내일엔 싸움만이 존재했네. 내일은 더 이상 경이롭지가 않았어. 내가 꿈꾸던 이야기도 타락했지. 전투 속에서 난 내 자신을 잃어버렸네. 감성도 잃었고 암울하기만 했지. 결과적으로, 세속을 벗어나고 싶었네. 정취를 남기지 않고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긴다면, 어쩌면 난 그 때야 비로소 노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 어느날 뜨거운 태양으로 뉴젤름의 모래사장이 반짝이던 때, 나는 무언가를 느꼈지. 우리는 태양이 밝고 뜨겁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을 직접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는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쩌면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네. 나의 삶 역시 어쩌면 피상적인 이야기로만 수두룩 하다는 것을. 그리고 내 여행은 그 태양의 이면을 확인하기 위해 시작되었지."

나의 이야기는 진솔했고 그 친구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때 그는 결코 소년이 아니었다. 그 친구는 평소보다 진지하고 사려깊어 보였지. 사실 그 때 그 친구도 나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난 술에 취한 나머지 그 부분의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 후 우리는 한 동안 말동무가 되어 같이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친구의 꿈은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수 백년도 더 된 나무들이 우거진 숲 속을 지나 어느 고원지대에 도달했을 때 그는 말했다.

"이곳이야. 내가 찾던 곳은. 난 여기서 평생을 살겠어. 양과 토끼를 키우고 그들의 털로 실과 천을 만들거야."

이별은 슬펐지만, 난 과감하게 그를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간 이 곳에 돌아오면 너의 천으로 만든 멋진 옷을 선물해 줘."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겨 연주하던 화음과 춤을 즐겼다.

결국, 난 길고 긴 모험을 다시 홀로 떠났다. 떠나면서 난 생각했다. 어쩌면 먼 훗날, 그 친구는 나처럼 안락한 그 곳을 떠나 먼 길을 여행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난 그가 경험해보지 않은 그 곳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 많을 거라고 믿었다.

긴 시간이 흘러 앙상한 나무가 메마른 손을 흔들 때, 외딴 오솔길을 홀로 지나던 난 차가운 겨울 바람에 몸서리를 쳤다. 그리곤 문뜩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건 내가, 해변에서 자유와 안락함을 느꼈고 라마를 타고 길을 떠났으며 어린 친구를 만났던 시절을 상기시켜주었다. 황금빛 해변에서 연주했던 그 음악.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우리가 함께 연주했던 바로 그 화음. 그 시절을 회상했고 그 녀석이 그리웠다.

소침해진 채, 한동안 멍하니 나뭇가지를 올려다 보다가 저밀어오는 가슴을 주최하지 못하고 난 무릎을 꿇고 괴로워 했다. 그 영롱한 기억들은 나의 머릿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붙잩은 채 벗어날 수 없듯이 과거의 순간으로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괴로웠던 이유는, 사실 황금 빛 해변도, 이 층 테라스도, 라마도, 그 친구도 모두가 거짓이었고 그건 그저 내 작은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은 환상에 불과했으며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은 붙잡을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허망한 허구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오솔길 한 가운데 쓰러지듯이 괴로워하며 기침을 해댔다. 매우 외로웠다. 나는 그 소년이 머무는 고원지대의 목장으로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차갑고 싸늘한 매서운 겨울 공기는 매정하기만 했고 내 주위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는 뉴젤름이나 소년이 살고 있을 고원지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난 망연자실 하듯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래도 나의 기억 중에 유일한 진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류트의 선율이었다. 그나마 내가 그 추억을 상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정신을 차린 난 그 선율을 악보에 재빨리 옮겨적었다. 잊혀진다는 사실에, 내 기억에서 다시 사라질까봐. 그리고 그 선율의 제목을 “Coin Song" 이라고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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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할 수 있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첫 번째 문은 천국으로 향하는 문.
두 번째 문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문.
세 번째 문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문.

한 사람씩 선택의 길에 도달했을 때,
모두들 망설이지 않고 첫 번째 문을 통해 천국으로 향했다.

간혹, 두 번째 문을 택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지옥으로 향하는 세번째 문을 택한 자가 나타났다.

옥황상제가 의아해하며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는가?"

그러자, 그 자가 대답했다.

"혹여나 지옥이 궁금해 지옥을 향해 발을 디디는 자들을 있을까 봐입니다."


"전 지옥의 문 뒤에서 그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저지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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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행성에 뜨거운 생명체가 살고 있었다.
삶에 대한 의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불타는 열정과 의욕을 느꼈다.

우주가 시간을 초월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맞이하는 동안, 그들은 넘치는 의욕을 원동력으로 점차 발전하고 진화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사는 행성은 결국 마그마(Magma)와 같이 고온으로 불타는 지대로 변하고 말았다.

피가 끓어오르는 그 뜨거움이 모이고 모여서 결국 용암이 솟구쳐 버린 그 곳.
너무나도 뜨거운 나머지 그 행성엔 그들 말곤 살 수 있는 다른 생명체는 전혀 없었다.

그들에겐 슬픈 사실이었지만 그 뜨거운 의욕은 그들의 본능이자 최고의 미덕이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더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들은 여전히 그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며 값진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이 불태우는 그 열정은 우주 저편의 모든 행성의 본보기가 되었고 타 생명체들의 에너지원이 되었으며 눈부신 빛이 되었다.

하지만, 오직 자신들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그 붉은 행성에선
광활한 전 우주 곳곳의 행성들을 비추며 각 행성에 살아가는 이름모를 생명체들을 관찰하는 것이 그들의 재미있는 일상에 해당하였다.

그들이 우주 저편을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 그들의 강렬한 빛은 우주의 암흑을 씻어버렸다.
그 덕에, 우주 곳곳의 자그만한 돌덩이조차도 빛을 받아 반짝였으며, 우주의 행성들은 서로를 마주볼 수 있었다.

한 편, 그 붉은 행성으로부터 머지 않은 곳에는 알록달록한 푸른 빛의 작은 행성이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생명체는 불타오르는 그 행성을 '태양'이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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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은 밤.

랜턴 빛에 의지하며 어두운 강 위를 홀로 나아가는 조각배 위의 내 자신을 발견했다.

차갑게 요동치는 강물의 몸부림.
끊임없이 일렁이며 내 주위에서 춤을 춘다.
그건 마치 암흑 터널 저편에서 다가오는 셰이드(Shade) 같다라고 할까?

숨을 죽이며 살며시 살며시.

보이지는 않지만 살기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몰라볼 리가 없어.
잠을 자는 아이조차도 그의 뼛속부터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놀라 잠에서 깨고 말아.

그래, 그런 느낌이야!

요란한 강물의 몸부림은 숨을 죽이며 다가오는 셰이드(Shade)!
아무리 슬그머니 다가온다고 한 들, 엄습해 오는 무시무시한 그의 존재를 감지하곤 오싹하고 말지!

두려운 나머지 어둠을 응시한 채 노를 힘껏 저어보지만 어쩌할 도리가 없네.
그저 초라한 조각배 위에서 추위와 공포에 몸서리칠 뿐.

결국 더 이상 나아가질 못해.

노를 놓아버리곤 망연자실하듯 랜턴 빛을 한동안 응시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초라한 현실은 그대로다.

강물에 비친 내 자신이라도 바라봐야겠어.
그 잘생긴 나의 모습을 말이지.

조각배 너머 고개를 내밀곤 강물을 내려다 본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없던 투박한 수면 위로 남자의 형상이 비친다.

응? 근데 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잿빛 머리와 수염으로 너저분해진 형상.

주름이 깊게 패이고 움푹 꺼진 눈과 입술.

세월의 흐름보다 더 많은 상처가 새겨진 그의 얼굴.

돌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받곤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강물에 비친 나의 모습.
그는 셰이드로부터 헤어나오려고 요동을 일으키고 있다.

얼굴이 일그러진 채 몸부림을 치는 그의 모습은 심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음에 틀림없다.

인상을 찌푸린채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결단을 내린다.

"난 그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어야 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앙상한 내 손을 강물에 뻗으려는 순간, 강물은 잠잠해졌고 싸늘한 바람과 함께 랜턴마저 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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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푸른 잔디밭 너머로 마을 울타리가 보였고 멀리 보이는 작은 배불뚝이 동산들...

언덕 너머로 파스텔 풍 푸른 하늘과 둥실둥실 춤을 추며 흘러가는 새햐얀 구름들...

새들의 지저귐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겨 마을을 향해 나아갔어.

그 모든 것들이 온화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처럼 나에게 평화를 안겨다 주었지.

"평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원이거나, 천국이 아니었을까?

난 꿈을 꾸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고,

뭐, 그래도 좋아. 꿈이라고 해도.
이 꿈이 끝나면 모든 게 한 순간에 사라지더라도.

난 지금 잔디밭 위를 뛰어가고 있어.
그래, 마을의 입구로 말이야.
진정 천국으로 가는 순간이었지!

거긴 내가 꿈꾸던 이상이 있음에 틀림없어.

아침엔 따스한 햇살과 새들의 멜로디.

오후엔 서늘한 바람이 불면 아카시아 향이 코를 간지럽히고
미소로 가득한 아이들이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웃음소리가 메아리치지.

버들나무 너머로 은빛 호수에 매료되어 있을 땐,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석양과 함께 다가오는 그 곳.

고요한 정막에 다달은 순간엔,
어느덧 숨 죽이듯 찾아온 달빛이 당신의 얼굴을 비춰 버리지.

수줍은 미소로 가득찬 당신의 미소말이야. 훗...

아, 뉴 소르피칼에 대한 설레임이 나를 흔들고 있어!
그 곳에 도착하려는 순간에 말이야!

어떻게 나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겠니?

곧 꿈을 깰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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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나의 동심으로 양들은 풍선이 되어 하늘을 날 수 있었고 감수성은 풍성한 숲 속의 안개 속, 촉촉히 젖은 아침 향기와도 같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릴 적 동심을 잊었고 풍성한 나의 감수성도 조금씩 사라짐을 느꼈다. 그리고 [어린왕자] 이야기 같았던 나의 꿈은 현실과 완전히 달랐으며 그건 그저 허망한 꿈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깊은 밤, 손님이 별로 없는 한적한 바에서 쓸쓸히 위스키를 들이키고 있다. 낯설지만 어여쁜 아가씨가 옆자리로 다가와선 술 한잔 달라고 빈 잔을 내민다. 말 없이 술을 따라주곤 만다. 그녀에게 나를 어필할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녀는 기다리듯이 나를 지켜보다가 내 옆에서 술 한잔을 들이키곤 씁쓸한 미소만 남긴 채 자리에서 떠난다.

여전히 혼자 고뇌에 빠져선 술을 들이키고 있다. 이번엔 단골인 듯 낯익은 남자가 옆 자리에 앉고선 이상한 질문을 툭 던진다. 

“당신은 요즘 가장 괴로운 게 뭐지요?”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쉽사리 떠오르는 건 없고 그 사람의 질문의 요점도 파악하기 힘들다. 

“당신의 그 쓸모없는 질문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뭔가 있어 보일려고 했지만 상대방을 추궁하듯이 내뱉은 대답에 그 역시 씁쓸한 미소만 남긴곤 자리에서 떠나버린다. 난 스스로 자책할 여지를 파악해 보지만 결과는 그저 고뇌에 빠진 모습일 뿐이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나, 위스키 한 병이 바닥을 거의 드러내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선술집을 나선다.

초승달이 보이는 밤하늘과 한적한 밤거리가 말없이 나를 반겨줄 뿐. 희미한 불빛들이 아롱거리곤 그 불빛들로 도망치듯이 나타나는 도시의 그림자들. 나는 그 그림자들을 따라 집으로 발걸음을 비틀비틀 옮긴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호수가의 통나무집이다.

집에 도착한 후, 방 한가운데 테이블에 놓여진 작은 랜턴 조명에 의지하며 갑자기 미친 사람 마냥 기쁜 표정을 지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래밍을 한다. 어느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바깥 세상과 단절된 이 통나무 집안은 아른거리는 빗줄기의 흔적들을 유리창에 새겨놓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나의 손가락이 보이질 않는다. 나의 정신 세계의 조물주는 무언가를 구축해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 한다. 그리곤 동기도 목표도 잃은 채 그저 미친사람 마냥 손가락이 가는 대로 계속 키보드를 두들긴다.

미친듯이 빨라진 손가락.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줄기도 더욱 굵고 거세다.

순간 섬광이 집안의 조명을 삼키곤 정신 사나운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본 후 사라진다. 곧 이어 천둥 소리가 천장 너머로 으르렁댄다. 마치 집채만한 들개의 울부짐 같다. 우스운 건, 나는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으며 오히려 손가락은 타 들어가듯 빨라졌다는 것. 그리곤 입가엔 미소가 번지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에 반해, 바깥 세상엔 거친 천둥 바람이 미친듯이 포효하며 세상을 때려 부수려고 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소하지만 통나무집은 이미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며 호수에는 미친 소용돌이가 통나무집을 덮치려고 한다는 사실도 전혀 관심없다.

나는 미친 사람마냥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긴다. 나의 손가락은 잿가루를 날리며 타들어가고 있다. 그 뜨거움은 전율을 일으킨다.

타오른다! 나의 환희가, 나의 미소가! 점점 뜨겁게! 더 뜨겁게!

아! 얼마나 뜨거웠으면 집안엔 잿가루가 가득 날리고 있단 말인가! 나의 미소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희열에 가득차 있다. 희열과 잿더미로 가득한 공간! 그 때 그 순간, 호수의 소용돌이가 쓰나미처럼 솟구쳤다. 그리곤 산처럼 높이 솟아오른 물줄기는 거대한 산사태처럼 무시무시한 괴음과 함께 통나무 집을 덮치고 만다.

잠시 후, 호수는 사라졌으며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통나무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뜨거움 역시.

그 잿가루도 미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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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한 새가 있었다. 새벽같이 맑은 목소리의 그 새는 너무나도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들은 그 새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 새가 나타났다 하면 누구든 몰려와서 그 새의 자태를 감상하였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그 새의 노래에 전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새에 대한 애정은 커져만 갔고 이제는 그 새를 보는 것은 행운이었고 길조였다.

애정이 넘쳐 새에 대한 욕망으로 시름한 누군가는 그 새를 항상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한 남자가 그 새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나머지, 엽총을 가지고 그 새를 향해 접근하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발걸음은 쥐 죽은듯...

고인 침이 그의 목젓에 닿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은 그의 턱끝에 매달렸다.

나무에 앉아 아름다운 자취를 뿜는 새여! 새를 정확히 겨냥한 남자는 가볍게 방아쇠를 당겼다.

천둥소리와 함께 몸부림의 날개짓의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분명 새를 맞췄을 것이다. 그는 곧장 새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나무 아래엔 새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새의 흔적은 없었으며 그가 하루종일 땅을 샅샅히 뒤지는 동안에도 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사람들이 그 새를 잊을 때까지 그 새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며, 훗 날 동화같은 이야기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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