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의 동심으로 양들은 풍선이 되어 하늘을 날 수 있었고 감수성은 풍성한 숲 속의 안갯속, 촉촉이 젖은 아침 향기와도 같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릴 적 동심을 잊었고 풍성한 나의 감수성도 조금씩 사라짐을 느꼈다. 그리고 [어린 왕자] 이야기 같았던 나의 꿈은 현실과 완전히 달랐으며 그건 그저 허망한 꿈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깊은 밤, 손님이 별로 없는 한적한 바에서 쓸쓸히 위스키를 들이키고 있다. 낯설지만 어여쁜 아가씨가 옆자리로 다가와선 술 한잔 달라고 빈 잔을 내민다. 말없이 술을 따라주곤 만다. 그녀에게 나를 어필할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녀는 기다리듯이 나를 지켜보다가 내 옆에서 술 한 잔을 들이켜곤 씁쓸한 미소만 남긴 채 자리에서 떠난다.

여전히 혼자 고뇌에 빠져선 술을 들이켜고 있다. 이번엔 단골인 듯 낯익은 남자가 옆자리에 앉고선 이상한 질문을 툭 던진다. 

“당신은 요즘 가장 괴로운 게 뭐지요?”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쉽사리 떠오르는 건 없고 그 사람의 질문의 요점도 파악하기 힘들다. 

“당신의 그 쓸모없는 질문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오.”

뭔가 있어 보이려고 했지만 상대방을 추궁하듯이 내뱉은 대답에 그 역시 씁쓸한 미소만 남기곤 자리에서 떠나버린다. 난 스스로 자책할 여지를 파악해 보지만 결과는 그저 고뇌에 빠진 모습일 뿐이다.

한 시간가량이 지나, 위스키 한 병이 바닥을 거의 드러내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선술집을 나선다.

초승달이 보이는 밤하늘과 한적한 밤거리가 말없이 나를 반겨줄 뿐. 희미한 불빛들이 아롱거리곤 그 불빛들로 도망치듯이 나타나는 도시의 그림자들. 나는 그 그림자들을 따라 집으로 발걸음을 비틀비틀 옮긴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호숫가의 통나무집이다.

집에 도착한 후, 방 한가운데 테이블에 놓인 작은 랜턴 조명에 의지하며 갑자기 미친 사람 마냥 기쁜 표정을 지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로그래밍을 한다. 어느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고 바깥세상과 단절된 이 통나무 집안은 아른거리는 빗줄기의 흔적들을 유리창에 새겨놓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나의 손가락이 보이질 않는다. 나의 정신세계의 조물주는 무언가를 구축해야 한다고 나를 채찍질한다. 그리곤 동기도 목표도 잃은 채 그저 미친 사람 마냥 손가락이 가는 대로 계속 키보드를 두들긴다.

미친 듯이 빨라진 손가락. 유리창을 두들기는 빗줄기도 더욱 굵고 거세다.

순간 섬광이 집안의 조명을 삼키곤 정신 사나운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본 후 사라진다. 곧이어 천둥소리가 천장 너머로 으르렁댄다. 마치 집채만 한 들개의 울부짐 같다. 우스운 건, 나는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으며 오히려 손가락은 타 들어가듯 빨라졌다는 것. 그리곤 입가엔 미소가 번지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에 반해, 바깥세상엔 거친 천둥 바람이 미친 듯이 포효하며 세상을 때려 부수려고 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소하지만 통나무집은 이미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으며 호수에는 미친 소용돌이가 통나무집을 덮치려고 한다는 사실도 전혀 관심 없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긴다. 나의 손가락은 재 가루를 날리며 타들어가고 있다. 그 뜨거움은 전율을 일으킨다.

타오른다! 나의 환희가, 나의 미소가! 점점 뜨겁게! 더 뜨겁게!

아! 얼마나 뜨거웠으면 집안엔 재 가루가 가득 날리고 있단 말인가! 나의 미소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희열에 가득차 있다. 희열과 잿더미로 가득한 공간! 그 때 그 순간, 호수의 소용돌이가 쓰나미처럼 솟구쳤다. 그리곤 산처럼 높이 솟아오른 물줄기는 거대한 산사태처럼 무시무시한 괴음과 함께 통나무 집을 덮치고 만다.

잠시 후, 호수는 사라졌으며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간 통나무 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뜨거움 역시.

그 재 가루도 미소도 함께...